수능을 치르는 날이 임시 휴일이라 멀리 영동군 황간면에 있는 민주지산을 다녀왔습니다. 며칠 전 같이 가기로 약속했던 선수가 새벽에 못 간다고 문자를 보내왔네요. 전에 구병산 등산 때도 그러더니... 앞으로 한 번만 더 약속을 어기면 데리고 다니지 말아야겠습니다.
영주에서 차로 두 시간 반을 달려 물한계곡에 들어서니 이동네는 가로수가 감나무네요. 늦가을 짧은 햇살에 먹음직스러운 감이 말랑말랑 익어갑니다.
곶감은 상주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영동군 곶감도 알아주는가 봅니다. 집집마다 특이한 방법으로 감을 말리고 있네요.
윗 동네 단풍은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가는데 여긴 절정입니다.
얼마 전 다녀온 소백산의 누리끼리한 단풍과는 때깔부터 다릅니다.
노랗게 시들어 가는 낙엽송과 짙은 초록색 잣나무, 핏빛 당단풍 그리고 누렇게 말라가는 이름 모를 활엽수들이 어우러져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한껏 뽐내고 있네요.
10시 30분 황룡사를 출발합니다.
기왕 먼 걸음 한 김에 삼도봉과 석기봉을 돌아 민주지산 정상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네이버 지도에서 11월 1일부터 일부 구간이 산불예방으로 폐쇄되었다고 해 영동군청에 문의한 결과 통행에 문제가 없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하게 출렁거리는 다리를 지나 계곡으로 들어섭니다.
영동군에서 행락객이 상수원 보호구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원천봉쇄를 했습니다.
마르면 너무 단단해 못이 들어가지 않고 잔가시가 많아 활용 가치가 별로인 낙엽송도 단풍이 드니 무척 곱네요.
삼도봉, 석기봉 방향입니다.
요즘 다람쥐들이 간덩이가 부었습니다. 사진기를 들이대도 달아나지 않네요.
우렁차게 흐르는 계곡 물 소리에 덩달아 마음도 발걸음도 가벼워집니다.
잔잔하게 흐르는 계곡 물에 알록달록한 낙엽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는군요.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서글픈데 새벽에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어 폭신폭신한 게 느낌이 아주 좋네요.
가을도 끝물입니다.
흑백 풍경에 조릿대가 파란색을 칠했네요.
잘 익은 다래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습니다. 몇 개 주워 먹어보니 새콤달콤한 특유의 맛과 향이 농약과 비료로 키운 망고나 골드키위 따위는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영동군에서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습니다.
산등성이가 보이는걸 보니 삼도봉 정상이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설천면 방향에서 올라오는 길과 물한계곡 가는 길이 만나는 삼마골재입니다.
내 걸음으로 1시간 30분은 올라야 하는 곳에 연세 많으신 어르신께서 이용하는 운동기구를 설치해 놓았네요.
잠시 쉬다가 삼도봉으로 오릅니다.
황룡사를 출발한 지 1시간 40분 삼도봉에 올랐습니다. 삼도봉은 지극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하여 삼도봉을 접하고 있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기념탑을 만들고 매년 10월 10일에 산신제, 풍물놀이, 사물놀이 등 다양한 행사를 한다는군요.
음~~~ 옛날 민주지산에 호랑이가 살았답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주위를 돌아다 보니 신불사 방향도...
민주지산 자연 휴양림 계곡도 단풍이 불게 타들어 가는데...
박석산 방향은 완전 딴 세상인 듯 삭막하기 그지없네요.
민주지산 가는 길 곳곳에 물한계곡으로 빠지는 등산로가 있습니다.
이놈의 까마귀가 아까부터 나를 따라 다니면서 시끄럽게 울어대는군요.
저기 바위 위가 석기봉 정상인가 봅니다.
밧줄을 잡고 힘차게 오르니...
맞네요 여기가 석기봉입니다. 삼도봉과 석기봉은 30분 거리입니다.
늦가을 물한계곡이 울긋불긋 아름다운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곧 겨울이 닥치면 고왔던 색동옷을 벗어야 하는 게 몹시 아쉬운 듯 현란하고 강렬한 자태를 한껏 자랑합니다.
같은 시각 같은 공간이지만 지나온 삼도봉은 색깔도 느낌도 전혀 다르군요.
아직 한참은 더 가야 할 민주지산의 우중충한 빛깔이 가뜩이나 힘든 발걸음을 무겁게 하네요.
멀리 길게 누운 덕유산 자락이 한눈에 다 들어옵니다.
석기봉에서 내려와 민주지산으로 향합니다.
한적한 오솔길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석기봉은 점점 멀어지고...
민주지산은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습니다.
민주지산을 올랐다가 이곳에서 황룡사 쪽으로 하산할 예정입니다.
황룡사를 출발한 지 3시간 15분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민주지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석기봉에서 민주지산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입니다.
민주지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백운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제강점기에 '민주지산'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원래 지명을 되찾을 수 있도록 관계 기관이 노력해야겠습니다.
민주지산에서 내려다보는 물한계곡 풍광이 끝내주네요.
지나온 삼도봉, 석기봉을 돌아봅니다.
규모는 작지만 늦가을 정취를 느끼기엔 충분한 억새가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한들거리네요.
민주지산에서 각호산 가는 길에 대피소가 있습니다. 국립공원도 아닌 이곳에 대피소가 있는 사연이 가슴 아픕니다. 1998년 4월 2일 특전사 흑룡부대가 천리행군 도중 해발 1,249m의 민주지산을 넘을 무렵 정상 부근에서 야영에 들어갔는데... 4월이라 방한복을 준비 못 한 것이 큰 실수였습니다.
야영 전 내린 비로 온 몸이 다 젖은 상태에서 초속 40km의 강풍이 불고 기온이 영하 10도 떨어지자 강추위로 고통을 호소하는 대원들이 늘어 구조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인해 헬기가 뜰 수 없는 상황이라 구조는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날 대원 여섯 명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으며 한 명은 끝내 찾지 못 했습니다.
사고 당시 민주지산 일대에는 30㎝가량의 폭설이 내렸고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 하는 등 악천후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 후 이곳에 지금의 대피소를 세웠다고 합니다.
요즘 개나 소나 다 입고 다니는 고어텍스 맴 블레인 처리한 야전상의를 보급했더라면 비를 맞아도 몸이 젖지 않으니 저체온증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쓸데없는 곳에는 예산을 펑펑 낭비하고 정작 필요한 것은 외면하는 행정 시스템이 피 끓는 젊은 청춘들 아까운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황룡사로 하산합니다. 크고 작은 돌들이 널려있는 너덜을 걸으니 발목이 아프고 무릎이 시큰거립니다.
늦가을 지름길을 지나온 해가 서서히 다이빙 준비를 합니다.
평평한 길이 나온 걸 보니 다 내려 온 것 같네요.
매년 마음속 책갈피에 단풍을 하나둘 끼워 넣다 보니 어느새 마흔여섯 장...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멀리 와 버린 내 인생이 서글프네요.
오늘 12km 거리를 5시간 걸었습니다. 이미 집에서 멀리와 있는데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가을입니다.
'Mountain Climb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옥산에서 태백산까지 (10) | 2013.12.26 |
---|---|
소백산 설경 (10) | 2013.11.30 |
청량산 축융봉 (10) | 2013.10.29 |
소백산 단풍 (8) | 2013.10.20 |
용문산 가섭봉 (12) | 2013.10.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