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산을 오릅니다. 오늘 오를 산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극찬을 한 단양의 명산 도락산입니다. 왕복 등산 시간이 내 걸음으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비교적 짧은 코스지만 밧줄을 잡고 미끄러운 바위를 기어올라야 하는 가파르고 험한 구간이 많아 결코 만만치 않은 산입니다.
외줄에 의지한 채 힘겹게 바위를 오르다 잠시 쉬면서 사방을 둘러보면 병풍처럼 펼쳐진 주변 풍광에 연신 감탄을 하고, 종잇장 같이 비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는 소나무의 모진 자태에 매료 당하고, 도락산 주봉인 신성봉에 올라 끝을 알 수 없는 아찔한 절벽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면 그동안 내가 쫓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이름 그대로 깨달음과 즐거움을 주는 - 道樂 - 산입니다.
10시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상선암을 지나 도락산으로 출발합니다.
저런 아담한 암자라면 인적 없는 첩첩산중 푸세식 화장실에 핸드폰, TV, 전깃불 없이 석 달 열흘을 살아도 행복할 듯 합니다. 가끔 너무 편하고 풍족해 주체를 못 하는 현실을 잠시 벗어나 조금 부족하고 불편한 곳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내린 눈이 얼고 녹기를 반복해 등산로가 얼음판 같이 매끌매끌합니다.. 아이젠을 할까 고민하다가 신고, 벗고, 털고 말리는 게 귀찮아 그냥 오릅니다. 덕분에 도가니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잠시 오솔길을 걷는가 싶더니 이내 가팔라지는군요.
강철 와이어를 잡고 바위를 오르는 등산은 맹숭맹숭한 평지 길을 걷는 것보다 스릴은 있지만 다음날 일어나면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쑤시고 아프지요.
도락산을 오르는 또 다른 코스인 검봉 자락에 서있는 거대한 바위가 보이는군요. 멀어서 높이가 얼마 되지 않아 보이지만 족히 25미터는 넘습니다.
매서운 찬바람이 콧등을 할퀴고 지나가는 겨울... 사방에 펼쳐진 풍경은 추위만큼이나 황량하기가 그지없네요.
중년의 부부가 오손도손 정다운 얘기를 나누며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참 부럽네요. 부부가 오래 살다 보면 취미도 같아진다는데 예전엔 마지못해 가끔 따라나서던 집사람이 언제부턴가 산에 가자면 기겁을 합니다. 그래도 살찌는 건 싫은지 몇 달째 저녁을 고구마로 때우네요. 불쌍한 여편네... 지금쯤 달콤한 낮잠을 때리고 있을려나?
흑백 사진에서 따뜻함이나 강렬함을 느낄 수 없듯 앙상한 잿빛 겨울 산은 볼품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소백산 연화봉이 훤히 건너다 보이는데 중국발 미세 먼지가 갈피를 못 잡는 내 마음같이 시야를 뿌옇게 흩어 놓았네요
온통 뽀족한 바위뿐인데 널찍한 마당이 있어 유심히 살펴보니 소나무 주위의 흙이 빗물에 쓸려 가지 않도록 포대에 흙을 담아 쌓아 놓았습니다. 혼자 느긋하게 산을 오르면 여럿이 다니는 등산보다 더 섬세한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휴일이라 등산객이 꽤 있습니다.
어릴 적 볼품없는 소나무를 보면서 왜 우리나라 산엔 삼나무나 전나무, 메타세쿼이아 같은 아름드리나무가 없을까 궁금해하며 외국의 쭉쭉 빵빵한 나무를 부러워했는데 산을 많이 다니다 보니 소나무만큼 환경에 잘 적응하고 어떤 모습이든 기품을 잃지 않은 나무도 없는 것 같네요.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릴 거라고 호들갑을 떨더니 평년치 만큼도 못하네요. 덕분에 오리털 파카가 무진장 팔렸다는 소문이...
제봉을 지나니 딴 세상에 온 것처럼 갑자기 경치가 바뀌는군요.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박인환 - 목마와 숙녀 중 -
도락산의 상징인 신성봉의 거대한 바위가 보이는 걸 보니 거의 다 올라왔나 봅니다.
신성봉입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개구리 몇 마리가 살던 웅덩이는 바짝 얼어붙었습니다.
아찔한 절벽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최면에 걸린 듯 갑자기 뛰어내리고 싶은 원초적인 몹쓸 충동을 느낍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푸석푸석하게 말라 가겠지요.
전에 없던 다리를 놨군요.
상선암을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도락산에 도착했습니다.
도락산에서 한 시간 거리에 황정산이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황정산까지 가 봐야겠습니다.
신성봉 정상 사방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습니다. iPhone 5S 카메라 성능이 원만한 똑딱이 빰을 후려치는군요. 줌 기능이 살짝 아쉽긴 하지만 이젠 무거운 DSLR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네요.
커피 한잔하고 왔던 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소나무 뿌리가 흙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군요.
우리는 가끔 자연에서 인공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는군요. 세월 앞에서 사그라지는 것이 나무뿐만은 아닐 겁니다.
잠시 편한 길도 있지만...
대부분이 가파른 바위틈을 비집고 네발로 걸어야 합니다. 오늘따라 그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는 무릎이 시큰거립니다.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무릎이 시려 하이바 쓴 걸그룹의 오기통 춤을 추게 되네요.
아직 오십 줄에 들어서려면 여러 해 남았는데 벌써 오십견이 온 건지 얼마 전부터 오른팔을 들 거나 휘두를 때마다 어깻죽지를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 함부로 놀릴 수가 없는데 오늘 줄을 잡고 오르내릴 때마다 속으로 연신 비명을 질러 댔습니다.
1시간 40분 만에 하산했습니다. 아이젠을 하지 않아 내려오는 내내 도가니가 아파 혼났습니다. 이제부터 당분간은 도가니 보호를 위해 무리하지 말고 오늘처럼 서너 시간 걸리는 적당한 코스만 골라 다녀야겠습니다.
집에 돌아와 뜨끈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고 나니 팔도 좀 풀리고 시큰 거리던 도가니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 인생에서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오십이 가까워오니 몸 여기저기에서 서글픈 신호를 보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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