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비봉산을 오르기 위해 의성군으로 달려 가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어 이렇게 좋은 날 사방 조망권이 전혀 보장이 안된 산을 오른다는 건 한 여름에 영남 알프스의 억새를 보러 가는 바보 짓을 하는 것 같아 바로 차를 돌렸습니다.
어디로 갈꺼나 장고 끝에 찾은 산이 속리산…. 속리산은 몇 년 전 늦겨울 상주, 구미 선수와 갈령에서 천왕봉, 문장대 거쳐 화북으로 종주하는 긴 코스를 잡았는데 마음만 급하고 준비성 없는 장정 셋이서 물 500mL 한 병에 작은 컵라면 하나씩 먹고 천왕봉을 오른 후 날이 저물어 하는 수 없이 장각동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때 걸은 시간이 무려 8시간…. 목 마르고 허기 져 고드름도 핥아 먹고 한라봉 껍데기도 씹어 먹었던 고생한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먼 길을 걸어볼까 합니다.
화북 주차장을 출발 문장대, 신선대, 비로봉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다시 돌아오는 왕복 13km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화북에서 천왕봉까지 7km 내 걸음으로 3시간 13분 걸렸네요. 의성군으로 가던 도중 차를 돌려 상주시 화북면에 도착하니 벌써 11시... 몇 년 전 시간에 쫓겨 고생한 기억 때문에 점심 먹은 시간 외에는 전혀 쉬지 않았고 매우 빠르게 걸었습니다.
천왕봉에서 화북 주차장까지 하산은 2시간 12분 걸렸습니다. 하산 때도 전혀 쉬지를 않았습니다. 같은 길을 왕복했는데, 오른 거리가 좀 더 먼 이유는 문장대를 올랐기 때문입니다.
집사람에게 문자로 출발 시각과 예정 도착시각을 날린 후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듯 속리산 품을 파고듭니다.
시작은 다소 여유롭군요. 문장대까지 3.3km... 야무지게 오르면 1시간 30분 정도 걸리겠네요.
해발 1,000m에서 흘러내리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는 횡격막을 울리고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계절의 끝자락을 잡고 귀청이 따갑게 울어대는 매미소리,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김에 심란했던 정신이 맑아지고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네요.
1시간 30분 만에 문장대 도착... 문장대는 본래 구름 속에 감춰져 있다 하여 운장대라고 하였으나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뺏은 수양(세조)이 요양을 위해 속리산을 찾아왔을 때 어느 날 밤 꿈속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 일러 주었고, 다음 날 이곳에 올라와서 정상에 올라 오륜 삼강을 명시한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는 허 본좌급 전설이 전해집니다.
문장대에 놓인 수직 계단이 쳐다만 봐도 염통이 쫄깃해지고 오금이 저리지만 마음을 다잡아 먹고 돌을 파 만든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오릅니다.
역시 여기 오기를 잘했네요. 이렇게 맑고 푸르고 높은 하늘을... 그리고 탁 트인 조망을 본 게 얼마 만인지...
가야 할 굵직한 능선을 따라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 천왕봉이 보입니다.
내가 대학 다니던 때 친구들과 여기 문장대를 두 번이나 올랐었습니다. 그때는 주변에 휴게소와 화장실이 있었으며 냄새가 심하고 무척 지저분했는데 지금은 싹 철거하고 깔끔하게 복원해 놓았네요.
갈 길이 멀고 다시 돌아와야 하니 서둘러 천왕봉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 3.2km...
돌아다보니 문장대 정상에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고 착각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바글바글하네요.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는 높낮이가 심하지는 않지만 오르내리는 구간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신선대 휴게소에서 감자전에 당귀 신선주 한 사발 하려고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지갑을 차에 두고 왔네요. ㅠㅠ 우리나라 국립공원 중 휴게소가 가장 많은 산이 속리산일 겁니다. 놀라운 것은 모두 개인이 운영한다는 사실입니다. 국립공원 내에 개인이 휴게소를 차린다는 건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 생긴 거라 제재 없이 영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점심은 저기 바위 꼭대기에서 먹는다.
속리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상을 차렸습니다. 앞과 좌우는 한 발짝 만 헛디디면 시신 수습불가...
비록 짭조름한 김밥 두 줄이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에서 제일 갑부인 별 세 개 회장님도 권력의 종착지인 청기와집에 사는 누님도 부럽지 않네요.
김밥 한 쪽 먹고 오른쪽을 돌아보며 감탄...
또 김밥 한 쪽 먹고 왼쪽을 돌아보며 감탄...
면발 땡기는 날 분식집에서 산 김밥은 너무 짜 면발은 땡길지 모르겠지만 김밥은 전혀 안 땡기네요.
너무 짜 억지로 한 줄 먹고 따끈한 봉다리 커피 한 잔 하니 여기가 무릉도원인지 샹그릴란지...
어제저녁 김천으로 이사 간 사촌 매제가 직접 배달한 씨 없는 포도... 큰놈은 씨알이 호두알 만 한데 어찌나 달고 과즙이 많은지 주스 마시는 느낌입니다... 프랑스는 거지도 3가지 코스요리를 먹는다는데 코스요리라 부르기에는 민망하지만 김밥에 커피에 과일까지 먹고 나니 프랑스 거지 안 부럽네요.
주위 풍광이 못 일어나게 붙들지만 갈 길이 머니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천궁의 성 라퓨타 같은 구름 아래로 천왕봉이 우뚝 솟았습니다.
몇 년 전 뉘엿뉘엿 지는 해는 보며 눈물을 머금고 장각동으로 내려섰는데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서니 감회가 새롭네요.
멀리 장각동이 보입니다.
천왕봉이 금방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쉽게 접근은 허락하지 않을 듯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다~ 왔습니다.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이 보입니다.
어렵게 셀카 질 말고 사진 잘 찍는 형아가 한방 박아 줄 테니 빨리 찍고 형아 정상석 찍게 썩 물러섰거라.
문장대보다 해발이 4m 더 높은 1,058m 천왕봉... 화북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3시간 20분 걸렸습니다.
공룡의 등뼈 같이 날카로운 지나온 능선들...
벌써 오후 2시... 돌아갈 길이 머니 잠시 숨 고르고 바로 돌아섭니다.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한여름이지만 목 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완전 가을바람입니다.
문장대 정상은 여전히 콩나물 시루입니다.
다시 문장대로 돌아왔습니다.
뛰다 싶이 걸었더니 1시간 6분 걸렸네요.
물 한 모금 마시고 화복 주차장으로 내려갑니다.
돌아왔습니다. 오늘 걸은 거리가 13km… 시간은 5시간 25분…. 한낮 햇볕은 따갑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가을입니다. 곧 온 산하가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로 갈아입겠지요.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장산 단풍 구경을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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