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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 Climbing

문경 운달산

by 변기환 2014. 5. 4.

세월호 침몰로 나라가 슬픔에 빠져있는 이 시국에 어딜 나 댕긴다는 게 왠지 죄를 짓는 것 같아 그동안 조용히 근신하며 지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충격은 가시고 슬픔은 사그라지지만 연일 계속 쏟아지는 참담한 소식에 우울증 걸릴 것 같아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조심스럽게 문경 운달산을 다녀왔습니다.


운달산은 경북 문경의 산북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령산, 주흘산과 함께 문경시를 둘러쌓고 있는 높이 1,097m 암산입니다. 금선대를 비롯하여 많은 기암괴석으로 덮여 경치가 아름다우며 일대에 신라시대 운달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김용사와 화장암, 양진암, 대성암 등 고찰과 맑고 깨끗한 운달계곡이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찾는 사람이 많은 곳입니다.


성철 스님이 30년 수도를 마치고 처음 설법을 하셨다는 김용사는 일제강점기경북 북부 일대에 45개의 말사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지금은 옛말사였던 직지사의 말사라고 합니다. 



김용사를 출발 장군목으로 운달산 찍고 석봉산에서 양진암을 거쳐 김용사로 하산하는 대충 계산해도 4시간 이상 걸리는 적당한 코스입니다. 전날 밤 다녀올 코스를 결정하고 인터넷을 뒤져 등산로를 확인해 둡니다. 그래 봤자 나중에 한순간 정신이 해까닥 해서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프가 다소 가파르긴 하지만 정상 부근을 빼고는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은 여유로운 코스입니다.



오전 9시 30분 화장암 앞에 차를 세워두고 운달산 정상 방향으로 출발합니다. 오랜만에 산을 찾았더니 어느새 산천은 초록으로 뒤덮였고 흙냄새며 풀냄새며 모든 게 새롭기만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행사 준비로 분주한 화장암을 지나 우렁찬 물 소리가 울려 퍼지는 운달계곡 상류로 들어섭니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에 비하면 굵기나 규모 면에서 초라하긴 하지만 산 중턱까지 크고 작은 전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섰습니다.



잠시... 세월호로 숨져간 안타까운 영혼을 위해 돌탑에 돌 하나 얹어 놓으며 묵념...



운달산 깊숙이 파고든 계곡을 벗어나자 널찍한 길은 사라지고 도가니가 괴로운 너덜길이 나타납니다. 황금연휴라 그런지 운달산을 찾은 등산객이 하나도 없습니다.



산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진 풍경은 산 아래 인공적으로 심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네요.



화장암을 출발한지 한 시간 만에 장구목 능선에 올라섰습니다. 장구목을 타고 넘는 거쎈 바람이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니 금방 서늘해집니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숨 좀 고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 등산로는 대체로 뚜렷하지만 이정표가 거의 없어 남은 거리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올해는 벚꽃도 작년에 비해 보름 정도 일찍 피더니 벌써 때이른 철쭉이 폈습니다. 소백산 철쭉 절정이 6월 초인데 올해는 5월 중순이 되겠네요.



장군목에서 운달산 정상까지는 바위를 오르내리는 다소 거친 구간이 계속됩니다.



가운데 봉우리가 대미산이며 오른쪽 우뚝 솟은 산이 황장산입니다. 몇 년 전 빗속에 여우골에서 대미산과 황장산을 9시간 넘게 걸었던 때가 생각나네요.



11시 20분 운달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1시간 50분 걸렸네요. 등산 안내도에는 2시간 30분 소요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정상에서 헬기장, 김용사, 석봉산 방향으로 하산합니다.



석봉산 도착...



석봉산 정상에서 좋아하는 노래 들어가며 이른 점심을 먹었습니다. 집 근처에서 김밥을 샀는데 소금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단무지를 골라내도 완전 소태네요.


세월호 침몰 후 즐겨듣는 노래가 벚꽃엔딩에서 플라워의 "힘겨워하는 아이들을 위하여"로 바꿨습니다



석봉산에서 김용사까지는 2.1km랍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김용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없네요. 네이버 등산지도에는 석봉산에서 양진암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고 나와 있거든요.



지도를 확인하니 갈림길을 지나쳤네요. 다시 돌아갑니다.



분명히 석기봉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몇 번을 오르내려도 갈림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GPS 로그 기록을 보면 몇 번을 헤매고 다녔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석봉산에서 양진암으로 하산하는 길을 찾지 못해 음지마 마을로 내려가는 등산로를 따라 계속 걷다가 지도를 보니 이길이 오미마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길이라 생각보다 멀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아 잠시 잔머리를 굴립니다.



장고 끝에 내 등산 경력에 최대의 오점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산을 가로질러 내려가면 삥 돌지 않고 갈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되는 결정을 해 버린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도 들리고 나지막하게 목탁소리도 들리는 게 질러가면 금방 김용사에 도착할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볼 때는 험하지 않아 쉽게 내려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좋았던 길은 잠시... 곧이어 지독한 경사와 낙엽에 덮인 너덜이 나타나고 살아 움직이는 너덜을 네발로 기어 가까스로 통과하자 이번엔 허벅지 굵기만 한 잡목을 간벌해 놨는데 잘린 나무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이건 뭐 밀림의 왕 타잔도 포기하고 돌아갈 정글이네요.



사실 판단이 어이없지는 않았는 게 조금 험하긴 하지만 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 계곡을 따라 걸으면 그렇게 힘든 구간이 아닌데 너덜과 잘라놓은 나무가 산을 뒤덮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다시 올라가기엔 너무 많이 내려왔으니 조심스럽게 헤치며 내려갑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허둥대거나 나대지 말아야 더 큰 불상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경사가 얼마나 급한지 서 있기도 힘든데 발끝에 걸리는 돌이며 베어 놓은 나무를 신경 쓰느라 등줄기에 진땀이 줄줄 흐르네요. 그 와중에 잔가지들은 연신 귀싸대기를 때리고...



산에 가는 줄 알았지 운달산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헤매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집사람에게 현재 위치를 알리려고 해도 전화가 터지질 않네요. 전화가 되지 않을 걸 대비해서 미리 지도를 받아 갔는데 차라리 지도가 없었더라면 시간은 좀 더 걸렸겠지만 편하게 등산로를 따라 하산했을 듯... 뭐 어쩌든 김용사가 가까워지긴 합니다.



약 40분을 무르팍 다 깨지고 온몸에 피 멍 들어가며 운달산 정글 탈출에 성공합니다.



흔적을 보니 미친뇬 널뛰듯 이리저리 온 사방 헤매고 다녔군요.



위성사진을 봐도 꽤 험한 구간입니다. 멘탈에 무슨 문제가 있어 무모하고 어이없는 짓을 했는지...



구글어스로 확인하니 대충 경사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저 경사를 어떻게 내려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해 집니다.



개울 너머 김용사로 이어지는 도로가 보입니다.



노숙 페이스에 무장공비 꼬락서니를 해가지고 차를 세워둔 화장암을 찾아 걸으니 지나는 차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등산 후 김용사를 둘러보기로 했는데 그럴 기분이 아니네요.



오후 2시 20분 출발지인 화장암에 도착했습니다. 왼쪽 양진암으로 내려왔어야 했는데 어디서 꼬여 개고생을 했는지...



개울물에 대충 씻으면서 다리를 살펴보니 까지고 피나고 멍투성이가 되었네요.




나중에 주차장에 서 있는 등산 안내도를 보니 네이버 지도와는 달리 석봉산에서 양진암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없네요.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으니 추억으로 남겠지만 오늘 일을 계기로 많은 걸 깨닭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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