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느끼는 것이지만 혼자 차를 몰고 산을 찾아갈 때는 마치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들뜨고 어떤 모습을 하고 기다릴까 몹시 설렙니다. 그래선지 차창 너머에 펼쳐진 낯선 풍경도 정겹고 긴 운전에도 콧노래를 흥얼 거리게 됩니다. 몸도 마음도 메마르고 푸석푸석한 꺾어진 마흔... 그러나 아직은 가슴 한 곳에 풋풋하고 애틋한 감성이 남아 있군요.
절정을 향해 치닫는 봄은 경천호에도 짙은 초록 옷을 입혔네요.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로 갈아입는 가을에 다시 와 보고 싶어지는 멋진 경치입니다.
오늘 오를 산은 문경시 동로면에 위치한 천주봉과 공덕산입니다. 문경은 대야산, 주흘산, 조령산 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1,000m 언저리 산들이 꽤 많네요. 당분간 문경의 여러 산들을 정복할 예정입니다.
멀리 요강을 엎어 놓은 듯 투구를 씌워 놓은 듯 생김새가 범상치 않은 산이 천주봉입니다. 높이 863m 천주봉은 하늘 높이 우뚝 솟아 기둥처럼 보인다 하여 천주봉이라 하는데 공덕산 방향에서 보면 큰 붕어가 입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양이라 붕어산이라고도 부른답니다.
높이 912m 공덕산은 운달산, 천주봉과 이웃하고 있으며 산 중턱 바위 사(四) 면에 부처님의 모습이 조각된 사불암이 있다 하여 사불산이라고 합니다. 산세가 좋아 대승사, 윤필암, 묘적암 등 여러 사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천주사 입구에 도착하니 아스팔트 포장 중이라 통행 불가... 땡볕에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물통에 물 채워서 대웅전을 돌아 삼성각 방향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오릅니다. 천주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천주사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신라시대 무념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의병을 숨겼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이 불을 질러 타버렸다고 합니다. 원래 절터는 과수원이 되어 버렸고 지금의 주지 중흥이 현 위치에 다시 절을 짓고 천주사라 명 했다고 합니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마애관음불상을 향해 나란히 도열한 석등들.... 석등마다 사람 이름이 적혀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
풍수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천하의 명당자리입니다.
오늘 다녀올 코스를 소개하지 않았군요. 천주사를 출발해서 천주봉을 오른 다음 공달산 정상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약 5km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코스입니다. 그런데 등고선을 자세히 살펴보니 천주봉과 공덕산은 아주 가까운 산인데 능선으로 이어져 있지 않고 각각 독립된 봉우리 같네요.
왕복 거리가 5km 남짓이지만 무려 4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특히 공달산은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1km 거리를 300m 이상 치고 올라야 합니다.
초장부터 숨이 깔딱 넘어가네요.
가파르게 치고 오르다 보니 오늘 지겹게 잡고 올라야 할 밧줄이 놓여 있습니다. 평소 거추장스러워 장갑을 끼지 않았지만 혹시나 해서 가져왔는데 안 가져왔더라면 땅을 치고 후회할 뻔했습니다.
잠시도 숨고를 틈을 주지 않는군요.
비탈진 산 중턱에 누군가가 돌탑을 쌓아 놓았습니다. 나도 돌 하나 올려놓으며 세월호 참사로 안타깝게 숨겨간 영혼을 위로하고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슬픔이 없기를 그리고 모두가 기본을 잘 지키는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돌탑을 지나 밧줄을 잡고 수직벽 몇 개를 오르니 울창했던 하늘은 벗겨지고 머리 위로 아찔한 절벽이 펼쳐집니다. 먼저 오른 사람이 있어 돌 굴릴까 봐 걱정되네요.
다른 사람들이야 아무렇지 않은 높이고 경사이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오금이 저리는 구간입니다. 한 발짝 딛는 순간 눈앞이 하얘지고 다음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네요.
거의 60도 이상인 경사를 밧줄에 의지한 채 올라야 합니다.
한참을 바들바들 떨면서 오르다가...
돌아다보니 그 와중에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숨이 막히게 아름답네요.
다리가 떨리고 심장이 벌렁거려 서 있기 조차 힘듭니다.
쳐다보니 뒤로 졸도할 것 같네요. 높은 곳에 섰을 때 느끼는 공포는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튼 가장 위험한 구간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른쪽은 수십미터 수직 절벽이니 안심할 단계는 아닙니다.
맨 정신으로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아 눈에 뵈는 게 없도록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천주사를 출발한지 약 한 시간만에 천주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어질어질하네요. 벌써 내려갈 일이 걱정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집니다. 그동안 가벼운 올림푸스 E-420에 50~150mm 망원렌즈를 가지고 다녔는데 오늘은 목 디스크 걸릴 각오하고 고기 두 근 무게인 캐논 600D에 광각과 망원 영역을 아우르는 18~200mm 렌즈를 가져왔으니 발 줌 할 필요 없이 원하는 모든 장면을 다 찍을 수 있어 좋은데 역시 무게가 장난이 아닙니다.
북으로는 대미산, 황장산, 도락산, 황정상이 한눈에 다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저번주 다녀온 운달산이 지척에 있는 듯 가깝네요.
동쪽으로는 높지는 않지만 고만고만한 능선이 끝도 없이 겹쳐진 그야말로 첩첩산중입니다. 중간에 무서워서 몇 번이나 포기할 뻔했는데 참고 올라오길 잘했네요.
천주봉 정상에 있는 산불 감시초소는 직원이 아직 출근을 안 했는지 오늘은 근무가 아닌지 잠겨 있습니다.
천주봉에서 공덕산까지는 1.8km 거리인데 지도에선 본 것처럼 능선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봉우리네요 그래서 그런지 생김부터 전혀 다릅니다. 천주봉이 거대하고 날카로운 바위산이라면 공덕산은 겉으로 보기엔 순하고 아담한 것 같지만 까칠함을 숨기고 있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속 다르고 겉다른 토산입니다.
잠시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쉬다가 칼날같이 날카로운 능선을 따라 공덕산으로 향합니다.
내려가는군요.
자꾸 내려갑니다.
또 내려갑니다. 산을 다 내려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출발지인 천주사 해발이 480m였는데 공덕산이 시작되는 이 지점이 580m입니다. 공덕산 정상이 912m... 여기서부터 공덕산까지는 1km... 거품 물겠네요.
아주 잠시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듯하다가 바로 급경사로 이어집니다.
청설모가 지난가을에 숨겨놓았던 열매를 찾아 나르는군요.
때이른 철쭉은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았는데 벌써 시들해지네요.
지나온 천주봉을 돌아봅니다.
공덕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천주봉에서 공덕산은 1.8km 거리... 한 시간이나 걸렸네요.
근처에 반야봉이 있지만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하니 패쓰~
그동안 가지고 다니던 코베아 삼각의자를 지난주 운달산 정글 탈출 하면서 잃어버려 다른 의자를 가져왔는데 넣고 꺼내기가 불편해 영 별로네요. 비싸지는 않지만 지금껏 100개 넘는 산을 오르는 동안 늘 함께 했는데 없어진 걸 알고 얼마나 아쉽던지...
점심으로 개당 800원짜리 삼각김밥 2개를 사 왔는데 가격도 양도 내용물도 매우 섭섭하네요.
삼각김밥 까먹고 천주봉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천주봉 정상에 섰습니다. 돌각대에 카메라 올려놓고 각도가 나오지 않아 나뭇가지로 괘서 12초 셀프타이머 맞춰놓은 후 잽싸게 바위에 뛰어올라 찍었는데 폼 잡기도 전에 찍혀 버려 15번 도전한 끝에 겨우 두어 장 건졌네요. 요 사진을 카톡 프로필로 결정....
이 길은 정말 다시는 걷고 싶지 않네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낮은 포복으로 기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봤더라면...
위험지대를 통과하니 올라올 때와는 또 다른 풍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천주암으로 내려왔습니다. 오늘 약 5km를 걸었는데 무려 4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다시 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풍수입니다.
사찰 처마끝에 매달린 풍경 속에 물고기 모양의 쇳조각이 들어 있는 이유는 항상 두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잠자는 시간도 아껴 정진하라는 의미입니다.
천주사 마당에 있는 큰 우물에서 땀 좀 닦고 잠시 천주사를 둘러봅니다.
천주사 입구에 서 있는 입석에 "관음영탑공원"라고 적혀 있어 뭔가 했더니 납골당이었네요.
몇 년 전 고소공포증 때문에 설악산 울산바위 계단을 못 오르고 중간에 돌아섰는데 오늘 어느 정도 공포를 털어 낸 것 같으니 기회가 되면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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