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소백산은 능선이 유순하고 산세와 풍수가 좋아 부석사와 초암사, 비로사, 희방사, 구인사, 성혈사 등 크고 작은 사찰이 저마다 내 놓으라하는 명당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산 이름 대부분이 불교의 영향을 받았듯이 소백산의 주요 봉우리가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으로 불리는 것으로 봐 소백산 역시 불교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순흥면에서 배점 저수지(송림지)를 돌아 지금은 폐교가 된 순흥 초등학교 배점 분교장을 지나 몇 분을 더 달려 성혈사로 접어드는 이정표의 안내를 받아 가파른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페인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성혈사 일주문을 만납니다.
성혈사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왕의 명을 받아 소백산 기슭에 초암사를 짓고 있었는데 매일 지붕의 서까래가 없어져 이상하게 여겨 찾아보니 인근 숲속에 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서까래가 쌓여 있던 주위의 풀을 뜯어 모아서 초막을 지었는데 그 초막이 성혈사의 시초가 되었고 절 근처 바위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해서 성혈사로 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보는 사람은 없지만 모범국민은 우측통행...
천년고찰 부석사도 안양루 밑을 통과해야 무량수전을 만나듯 성혈사 역시 누각을 지나야 대웅전을 볼 수 있습니다.
멋진 경치를 기대하며 누각에 올랐지만 전망도 풍수도 많이 아쉽네요.
대웅전입니다.
왼쪽 건물은 생김새와 규모로 봐서 식당과 기도 온 신도가 거주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요사채이고 오른쪽으로 산신각과 나한전이 그 뒤로 서열 순으로 기거하는 요사채가 들어 섰습니다. 부석사 다음으로 규모가 큰 것 같네요.
배수로를 정비하고 요사채를 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고요한 사찰에 울려퍼지는 굴삭기 소리에 여기가 사찰인지 공사판인지... 종교가 몸짓을 불리는 것을 볼 때마다 법정 스님의 "종교인의 뜨거운 신앙은 내면으로 심화해야지 겉으로 요란하게 드러나서는 안 되며 진정한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절간에서조차 내 소중한 사생활이 다 털리는군요.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가 태종 이방원으로부터 시작된 억불정책으로 깊은 산 속으로 내몰리면서 산을 지키는 산신에게 절의 안녕을 위해 모시게 된 것이 사찰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대개의 산신각은 조선 후기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산신각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산신각은 최근 보수를 하고 단청을 입혔네요. 사진 출처 - doopedia.co.kr
산신각은 대부분 호랑이를 탄 산신의 탱화를 모시는데 성혈사는 탱화와 산신상을 같이 모셨습니다. 요즘 산신께서는 입맛이 서양식으로 변해 사탕과 바나나, 카스테라를 드십니다.
보물 제832호로 지정된 성혈사 나한전은 1984년 해체 보수할 때 상량문이 발견되어 1553년에 처음 건립하였고 1634년 보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혈사가 6세기에 건립된 사찰인데 10세기 가까이 지나서 나한전이 세워진 걸로 봐서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은 말 그대로 설인 것 같네요.
우리나라 팔도 유명한 사찰 대부분이 의상대사나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 46개나 된다고 하니 이는 의상대사나 원효대사의 명성을 이용해 신도를 더 모으고자 두 대사가 다녀만 가도 창건했다고 한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실제로 당시 교통 여건과 토목·건축 기술, 장비 수준을 볼 때 46개 사찰을 창건했다는 것은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MB도 할 수 없는 업적입니다.
보수를 하고 화장을 해 깨끗합니다.
나한전 정면 좌우에는 거북 위의 간주석을 두 마리 용이 휘감고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한 석등이 있습니다. 석등에 기단은 없고 석등을 받치고 있는 용의 형상은 화려하게 기교를 부린 게 아니라 민화에 나올법한 다소 투박하고 간결하게 표현한 게 특징입니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내가 일부러 성혈사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나한전의 화려한 문창살 때문입니다. 나한전의 기둥은 배흘림식인데, 정면 3칸에는 모두 두짝의 문을 달았으며 저마다 독특한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불전의 창살이 아름다운 건물로는 부안 내소사의 대웅전, 논산 쌍계사의 대웅전 그리고 성혈사의 나한전이라고 하는데 그중에 으뜸이 바로 성혈사의 나한전입니다.
꽃무늬 문살... 특별한 기교 없이 단순한 문양이 반복되지만, 좌우 상하 대칭이 확실하고 입체감을 잘 살려 조각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 맞춘 장인의 놀라운 집중력과 섬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극락세계를 표현한 연지수금꽃문살... 나무의 특성이 습기에 약해 시간이 지나면 비틀어지고 서서히 갈라 터지는데 별다른 처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460년이 넘는 세월에도 원형 그대로 보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습니다.
왼쪽은 꽃무늬 문살 오른쪽은 모란꽃 문살... 한때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배양으로 유명세를 떨칠 때 그 기술이 젓가락으로 좁쌀도 집을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섬세한 손놀림 신공에서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실관계를 떠나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의학 수준이나 일본을 앞지르는 반도체 개발 기술로 볼 때 전혀 무시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편하다는 이유로 서양 포크로 대처하고 있다니 이 나라 성장 동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나한전 법당에는 석조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16나한이 보좌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찰은 대게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는데, 나한전에는 부처 대신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이 특이합니다.
성혈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요사채입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와 집사람이 막장 드라마에 빠져 있는 게 싫어 가장의 직권으로 TV를 없앤지 8년이 넘었는데, 요즘 승려들은 스카이 라이프를 통해 속세에 깨달음이 있다는 말씀을 잘 실천하고 계십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요사채 뒤꼍에 달걀형 비석이 서 있네요.
내려다본 성혈사 전경...
종교는 도량을 세우고 신도 수를 늘리는 데만 열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정 스님이 몸소 실천하신 무소유의 정신으로 검소하고 절제 있는 생활과 끊임없는 정진으로 번민과 번뇌에 빠진 불쌍한 중생이나 구원을 얻으려는 자의 믿음을 얻어 그들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야 하고 정치와 사상, 이념으로 갈라져 날을 세워 대립하고 있는 무리의 손을 잡아 화합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종교인의 역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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