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까지 산불예방 차원에서 출입을 통제하는 산이 많아 백두대간 협곡 길을 걷기 위해 봉화군 분천역에 도착습니다. 아직 눈꽃열차와 산타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관계로 분천역 산타마을은 휴일인데도 썰렁하네요.
숲길 안내센터에 들러 가야 할 길을 확인하는데 안내하는 아주머니 입 냄새가 얼마나 심하지 거의 실신할뻔했습니다. 설명은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썰렁한 분천역을 힘차게 출발합니다. 승부역까지 9.6km라는군요.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 가는 길은 A 코스와 B 코스가 있는데 A 코스가 9.6km 구간입니다. 나는 B 코스를 이용 승부역에 갔다가 A 코스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트레일 길이라고 A 코스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10Km 거리며 해발 800m 배바위재를 넘어야 하니 등산 경험이 많지 않은 분은 적어도 3시간 30분 이상 예상하셔야 합니다.
집사람 가까운 친척분이 사업을 정리하고 분천에 내려와 작은 찻집을 냈다고 하는데 아마 이 집 같네요. 지나는 사람이 적어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데...
젊었을 때는 살기 편한 현대식 주택이 아니면 절대 못 살 거로 생각했는데 나이가 드니 조금 불편해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생활이 가능한 아날로그식 삶과 허름하지만, 정겨운 공간이 슬슬 좋아집니다.
중간중간 야영하기 좋은 장소가 있습니다. 내년 여름이 기대됩니다.
지금 이 순간,
고민하지 않을 수 있으니...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니...
후회하지 않을 수 있으니...
혼자 길을 걸어도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습니다.
신혼 때 선배와 바로 여기 이 장소에 낚시를 왔었습니다. 고기는 안 잡히고 마침 근처에 사는 김초시가 찾아와 낚시는 팽개치고 막걸리를 푸기 시작했습니다. 김초시라는 분은 이름이 초시가 아니라 내가 지은 별명입니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은 지방 시험인 소과를 통과해야 대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대과는 다시 초시 과와 진사 과로 나눠지는데 김초시가 행정고시 1차를 합격했다고 내가 초시라는 별명을 붙여줬죠. 고시 1차에 합격하고 무슨 이유인지 2차 시험을 포기하고 여기로 내려와 다 쓰러져가는 집을 구해 궁한 생활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집사람이 선생이었고 자식도 있었는데 행동과 생각, 행색이 매우 독특한 분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선배와 김초시 내가 술잔을 높이 들 때 집사람과 선배 부인은 우리를 찾아 분천면을 다 뒤지고 있었나 봅니다. 새벽 무렵 술에 취해 있는 우리를 발견했고 사색이 된 집사람을 보고 다시는 낚시를 하지 않겠다고 그 자리에서 낚시 장비를 강물에 던져버렸는데 그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때가 생각나 집사람에게 문자를 넣었더니 여편네 쌩까네요. ㅠㅠ
비박 장비가 ㅎㄷㄷ
영주와 철암을 잇는 철로가 영암선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영암선을 일제강점기 때 놓은 것으로 아는데 1955년 우리 손으로 개통했습니다.
비동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갈림길이 나옵니다.
비동마을 갈림길에서 잠수교를 건너 B 코스로 이동합니다.
삶을 돌아보듯 지나온 길을 돌아봅니다.
길은 낙동강을 따라 계속 이어집니다.
철교 아래를 지나...
비동 임시역으로 올라섭니다.
비동 임시역은 역사(역 사무실)는 없고 표지판만 서 있습니다.
분천역에서 양원역을 지나 승부역까지 걷는 이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체르마트 길을 따라 아찔한 철교를 건너갑니다. 체르마트 길이란 우리나라 백두대간 협곡을 달리는 열차가 서는 분천역과 빙하 특급열차가 서는 스위스 체르마트역이 서로 닮았다고 해서 스위스와 한국이 50주년 수교기념으로 자매결연을 맺었고 비동 임시역과 양원역 사이의 길을 체크마트 길이라 명했다고 합니다.
철교에서 내려다본 경치가 장관입니다. 천삼백 리 낙동강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 상주 경천대라고 하는데 경천대는 명함도 못 내밀 듯...
터널은 걸어서 통과할 수 없고 산을 넘어야 합니다.
미끄러지면 그냥 대책없는 좁은 길을 따라 산을 넘어갑니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 사진은 잘 찍은 것만 추려 일부만 올리는 데 이번만큼은 글이 길어지더라도 찍은 사진 대부분을 올렸고 시간이 걸려도 느낌을 적었습니다. 이것도 여행이라면 여행인데 여행은 보고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고 그때의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왜곡될 수 있습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군 시절이 시간이 지나면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이 되는 것처럼...
차와 컵라면을 파는 매점 새댁이 예뻐서 뭘 좀 먹고 갈려다가 그냥 지나쳤는데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이유는 조금 이따가...
우렁차게 흐르는 강물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철길이 통과하는 곳 대부분 바위산이고 때로는 깊고 넓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이걸 우리 기술로 완공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그것도 1955년 6·25 사변 직후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했던 환경에서...
지금은 폐교된 원곡초등학교입니다. 원곡초등학교는 나와 작은 인연이 있습니다.
다행히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는 부부를 만났습니다. 2006년 원곡초등학교가 온비드에 공매 매물로 나왔고 나는 즉시 입찰을 했으나 입찰가가 낮아 낙찰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이 부부가 낙찰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부 부지가 철로에 편입돼 현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노부부의 긴 한숨을 뒤로하고 원곡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양원역에 도착했습니다. 이 동네 지명이 원곡인데 역은 양원역이네요.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원곡엔 기차가 서질 않아 이곳 주민은 먼 길을 걸어 장을 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끊임없이 원곡에 기차가 서기를 요구했고 다행히 역사 없이 기차만 정차하는 것으로 요구는 받아졌으며 대기실과 화장실은 주민들이 직접 지었다고 합니다.
양원역은 백두대간 협곡열차와 O-train 관광열차가 잠시 머무는 곳으로 먹거리와 토속 농산물을 판매하는 장터를 마을 주민이 운영 중 입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식사를 주문했으나 현재 양원역에 머무는 관광열차가 없어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답니다. 그래서 천 원짜리 막걸리 한잔을 주문했는데 결정적으로 지갑을 차에 두고 가져오지 않았네요. ㅠㅠ 다행히 마음씨 좋은 할머니께서 부담가지지 말고 그냥 마시라는데 미안해서 배낭에 들어있던 사과와 귤을 드렸더니 한사코 받지 않으시는 걸 억지로 드렸습니다.
내가 막걸리를 직접 담가 먹을 정도로 좋아하는데 술맛이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깊은 맛입니다. 인근에 사시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담그셨다는데 비법을 전수 받고 싶어지네요.
승부역에서 출발한 도보 여행객이 속속 도착하네요. 빈속에 막걸리 한잔 마셨더니 핑~ 돕니다.
점심을 먹고 갑니다.
오동통한 너구리 한 마리 잡았습니다.
급히 라면을 끓여 먹고 서둘러 길을 떠납니다. 길은 철길을 따라 계속 이어집니다.
대부분 구간이 험하지 않아 편하게 다닐 수 있습니다.
뱀만 주의하면 말이죠.
잠시 송진향이 그득한 소나무 숲을...
때로는 여자의 마음처럼 흔들리는 갈대 사이를 걷기도 합니다.
아직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합니다.
승부역을 약 3km 남겨두고 이제부터는 강폭이 확 줄어들면서 계곡도 물살도 거칠어집니다.
장마철에는 물에 잠길 듯...
험한 지형을 우회할 수 있도록 철계단과 난간을 놨습니다.
초등학교 때 철길을 건너 학교에 다녔는데 이제는 기차 다니는 게 신기하네요.
출렁다리가 보이는군요.
출렁다리는 여럿이 건너야 재미있는데 혼자 건너니 영 재미없습니다.
기차가 부지런히 사람도 태워 나르고 화물도 실어 나릅니다.
발 디딜 곳 조차 없는데 어떻게 난간을 설치했는지...
이 터널을 빠지면 바로 승부역인데...
길은 강을 따라 한참을 돌아가야 합니다.
드디어 승부역에 도착했습니다.
부천역에서 승부역까지 측정한 거리는 13km며 4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승부역 앞 잠수교를 건너 분천역으로 돌아갑니다.
분천역까지는 9.6km라고 적혀있는데 실제 거리는 더 멀 거라 생각됩니다.
승부역 모습...
눈꽃열차는 19일부터 산타열차는 22입부터 운영 예정이라 승부역 앞 먹거리 장터는 개장휴업 중입니다.
먹거리 장터를 지나 배바위 고개를 찾아갑니다.
벌써 3시 배낭을 뒤져보니 양갱 하나와 배터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헤드 렌턴이 있으니 해가 져도 걱정은 없겠네요.
배바위 고개까지는 은근히 빢쎈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아 배터리가 금방 퇴근을 합니다. 새로 장만한 보조배터리는 아이폰을 한번 충전할 수 있네요.
그런데 카메라 배터리가 간당간당합니다.
여기서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카메라 사망...
이하 모든 사진은 핸드폰으로 찍고 약간의 뽀샵질을 했습니다.
해발 800m 배바위 고개에 올랐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오른 길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네요.
비동마을로 내려왔습니다. 10여 년 전 내가 이곳에 김초시를 만나러 왔을 때 태풍 매미와 루사가 할퀴고 지나간 상처가 너무 커 복구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못 알아보게 변했습니다. 그사이 여기저기 집도 많이 지어졌고... 김초시 집은 지형이 너무 변해 도저히 찾지를 못하겠습니다. 행색과 행동이 남다르고 독특하긴 해도 박식하고 재미있는 분인데... 살아 있으면 언젠간 만나겠지...
다시 비동 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분천역까지는 약 4km...
휴~ 출발지인 분천역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23km를 걸었으며 6시간 12분 걸렸습니다.
혹시 이글을 보고 나도 이 코스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준비를 철저히 하시는 게 좋습니다. 분천역을 출발 양원역 거쳐 승부역까지 거리가 13km입니다. 꼬박 4시간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승부역에서 분천역까지 돌아가는 코스는 해발 800m 배바위재를 넘어야 하는 가파른 구간이 있습니다. 최소 3시간 30분은 걸립니다. 내가 6시간 조금 더 걸린 것은 대부분 구간을 뛰다시피 바쁘게 걸었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해가 짧으니 도착이 늦지 않도록 출발을 서두르시는 게 좋습니다. 길은 뚜렷하고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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